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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머리 검은 짐승’
관리자
2004.10.19
조회 5,524
[국민일보 2002-04-10 11:42]
속담은 선인들이 살아온 수많은 삶의 행적이자 지혜의 농축이다. 대부분은 재치와 해학으로 사람을 유쾌하게 하거나 정곡을 찌르는 촌철살인으로 무릎을 치게 하지만 개중에는 지나치게 격한 표현을 씀으로써 불쾌감,나아가 섬풼한 느낌마저 주는 것들도 있다. 한 예가 ‘머리 검은 짐승은 구제를 말랬다’는 속담이다.
‘머리 검은 짐승은 남의 공을 모른다’는 원형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이는 이 속담에서 ‘머리 검은 짐승’은 두말 할 것 없이 사람. 물론 배은망덕을 경계하는 속담이지만 인간에 대한 불신을 심화,혹은 조장할 뿐 아니라 남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로 오늘날 고아 입양을 거부하는 사람들 가운데 그 이유로 이 속담을 들먹이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꼭 그래서일까마는 지난해에도 미국에 입양된 한국 고아가 1870명으로 여전히 3위를 차지했다는 보도다. 우리 나라의 대미 ‘고아 수출’은 1980∼94년 줄곧 1위(91년만 2위)를 해오다 95년부터 2000년까지는 그나마 3위로 떨어졌다. 경제 규모로 세계 12위요,올림픽은 이미 개최했고 곧 월드컵 축구대회까지 치른다는 나라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그동안 고아나 기아(棄兒)의 국내 입양을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 가톨릭 사회복지회가 89년 설립한 ‘성가정입양회’라든가 88년 결성된 ‘사람 사는 정을 심는 모임’(99년 ‘평화모자복지회’로 개칭) 등이 ‘우리 아기는 우리 손으로’라는 표어 아래 국내 입양을 위해 갖은 애를 써왔다. 또 국내 및 공개입양을 장려할 목적으로 99년 만들어진 한인입양홍보회는 2000년 10월 처음으로 전국양부모대회를 열기도 했다.
그런데도 상황이 달라지지 않은 데는 당연히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이원복 교수는 전통을 정통으로 여겨온 우리 문화 속에서 ‘혈통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강박관념’을 원인으로 본다. 또 박영숙 한국 수양부모협회장은 국내 입양 활성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재산상속을 들고 있다. 피가 섞이지 않은 입양아에게 재산을 상속하는 일이 부담스러워 아예 입양을 포기한다는 것.
타당한 지적이지만 좀더 절실한 이유도 있을 법하다. 갈수록 늘어가는 사교육비 등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여건이 지극히 어려운 우리 현실이 그것이다. ‘내 자식이라도 남들처럼 뒷바라지 못해주면 부모를 원망하고 나중에는 심지어 구박까지 하는 판에 하물며 남의 자식이랴’ 하는 심리. 거기에 ‘머리 검은 짐승…’ 운운하는 전래적 의식까지 끼어든다면 국내 입양 확대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머리 검은…’ 같은 속담만이라도 없어지면 좋으련만.
김상온 논설위원 sokim@kmib.co.kr